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서울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바로 도시에 자리 잡은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낸 수많은 '서울 키즈들이다. 이제 성인이 된 이들에게 '당신이 어릴 적 살던 집이 그대로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다수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개발의 광풍이 몰아친 이 도시에서 건물 또한 수십 년을 버틸 재 간이란 없다. 이렇게 상실의 시대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랜만에 찾아간 옛 동네가 완전히 달라져버린 모습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인 걸까.
내 삶의 터전, 서울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에 올라온 게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에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길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제 고향이라 할 수 있죠." 정희우 작가 또한 전형적인 서울 키즈 중 한 명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83년에 대치동으로 이사해 지금 까지 살고 있다. 미술학도를 꿈꾸던 소녀가 서울대 동양 화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학 교수가 되기까지 강남은 삶의 터전이자 기억의 공간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이미 30년 넘은 아파트예요. 그런데 이곳도 곧 재개발이 된대요. 제 입장에서는 고향을 잃어버리는 일이니까 아쉬운데, 아파트 외벽에는 '축 재건축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더라고요. 집값이 오르는 건 좋은 일일수 있지만, 그 대가로 내 어릴 적 기억을 내줘야 하는 거죠."
몸은 강남에 있지만, 어릴 때부터 끌리는 지역은 항상 강북이었다. 왠지 모르게 대치동에 이사 가기 전에 살던 이문동 주택가가 더 좋았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살 곳을 직접 결정할 수 있을 때에는 강북에 가서 살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된 후 실제로 가본 그곳은 이미 변한지 오래였다. 종로나 성북동처럼 오래된 동네는 다를 거라고 믿었지만,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서울은 매일 공사 중이고 어제의 기억은 오늘, 오늘의 기억은 내일 지워지기 일쑤였 다. 이렇게 삶의 흔적이 있는 곳들이 재개발로 인해 죄다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자 위기감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서울에 대한 감정은 굉장히 복잡 미묘해요. 서울을 좋아하지만 꼭 아름다워서 그런 건 아니고, 오랜 시간 살 아오면서 내 삶의 흔적이 있는 공간에서 느껴지는 애착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거죠. 근데 밉건 곱건 고향이 자꾸 변하면서 제 기억도 함께 강제로 삭제되는 기분이 들었어 요. 그래서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을 남기자고 결심했죠."
도시를 탁본하다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는 외관과 달리텅 비어가는 도시의 기억을 붙잡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서울의 구석구석을 사진이나 그림이 아닌 '탁본' 작업을 통해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탁본을 하면 사진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을 얻게 돼 요. 물먹인 종이를 건물 벽에 붙인 다음 먹을 묻힌 솜방망이로 계속 두드려 문양을 찍어내는 방식의 작업이죠. 그렇다 보니 겉으로 보이지 않는 촉각적인 것도 남기는 장점이 있어요. 하얀 타일 벽을 사진으로 찍으면 평면이지만, 탁본을 뜨면 못 자국이나 스티커를 뗐다 붙인 흔적들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니까요. 어떤 느낌이냐 하면, 마치 마을 입구를 지키는 오래된 나무를 보는 기분이에요. 건물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웃고 우는 걸 죄다 보고, 기록한 역사 그 자체랄까."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
종로의 후미진 골목길과 나무 간판, 강남대로의 맨홀 뚜껑과 도로 위의 화살표 등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고 마는 서울의 일상이 그녀의 손길 아래 차곡차곡 쌓여갔다. 압구정동과 여의도동, 이촌동 등 1970~1980년대에 개발된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담벼락도 탁본으로 남았다. 몸보다 큰 크기의 종이를 바르고, 오랜 시간 문지르는 일은 육체적으로도 쉽지 않다. 그런 그녀에게 힘이 되는 건 도시에 서 만난 사람들이다.
"처음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분명 쉽지않을 거라고 걱정했어요. 그런데 제가 마주친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미술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어서 놀라웠어요. 탁본하는 걸 알아본 어르신들은 그걸 드러내고 싶어 하시고, 작업의 의도를 말하면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어요. 제일 처음, 강남의 한 주차장 앞 도로에서 화살표 표시를 탁본하던 날이었어요. 마침 전화 공사 때문에 길을 막아놨길래 눈치를 보면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일하는 분들이 궁금해 하며 다가오더라고요. 도시의 역사를 남기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을 하니까 '그럼 우리가 첫 번째 관람자가 되는거냐'면서 재미있어했어요. 결과 물뿐만 아니라 이렇게 탁본을 하는 행위 자체가 일련의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종로와 강남역 사이에서
뜻밖에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은 그녀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한 번은 종로3가의 한 보청기 가게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이 동네에는 왜 이렇게 보청기 가게가 많냐고 여줬더니, '노인들이 많아서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왜 노인이 많은가요?"' 하는 그녀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다들 종로3가에서 약속을 하고, 데이트를 하고, 술 한잔하던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여길 못 떠난다'라고.
"강남역을 가득 메운 지금의 20대들 또한, 50년 후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만남의 공간은 강남역 뉴욕제과나 타워레코드였어요. 그 공간이 무엇으로 바뀌든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앞에서 모이고 헤어질 거예요. 저는 어쩌면 이러한 급속한 변화를 지켜본 증인이기 때문에, 그 역할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어요."
냉정한 도시에 따스한 체온을
냉정하고 차가운 도시의 구석구석을 따뜻한 체온으로 어루만진 탓일까. 그녀의 결과물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아 름다움을 선사한다. 항상 우리 곁에 배경으로 존재한 공 간은 하나하나 주인공이 되어 뚜렷한 존재감을 뽐낸다. 누구 하나 주목한 적 없는 맨홀 뚜껑에 그려진 대 칭 무늬의 우아함과 타일과 벽돌이 결합한 기하학적 형 태는 고가의 추상화 작품을 연상시킨다. 발밑의 흔한 도 로 표지조차 근사한 서예 작품처럼 보일 정도다. 그녀의 작업은 이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될 예정이다.
"되돌아보면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에 대한 것이었어요. 지금까지는 도시 속 풍경에 깃든 개미처럼 군중을 그렸다면, 이제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인물화를 그리고 싶어요. 실제 모델을 앉혀 놓고 몇 시 간이든 그의 아이덴티티가 나올 때까지 집중하는 거죠. 10년 전 사진을 보면 시대에 따라 화장이나 옷만 다른 게 아니라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달라요. 이 시대, 이 공간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걸 분명히 기록하고 싶어요. 저에게는 시대의 관찰자라는 임무가 있으니까요."
'일반 설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름 위의 마천루 산책 (0) | 2021.11.02 |
---|---|
어반 멜로디즈, 두 도시 이야기 (0) | 2021.10.31 |
자식에게 노후 의존하는 시대 지났다 (0) | 2021.10.23 |
평균 수명 100세 시대! 오래 살 위험에 어떻게 대비하고 계십니까? (0) | 2021.10.23 |
상해의 추억 (0) | 2021.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