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무렵 대구와 서울의 골동상에는 그 동안 별로 발견된 적이 없던 화려한 청동기, 철기와 토기가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골동상들은 경상도 모처의 유적에서 나온 진품이라 했지만 노련한 도굴꾼들조차도 진품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유물들이었다.
그러자 도굴꾼들은 제값을 받을 생각으로 대담하게도 학계의 권위자들에게 접근하였고, 이 물건을 본 학자들은 모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학자들과 관계부처의 문화재 전문 위원들은 이 엄청난 물건이 어디서 도굴되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도굴꾼들은 처벌받지 않고 물건을 팔려고 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복잡한 흥정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1년여 가까이 걸린 어렵고도 긴 흥정 끝에 초기 철기시대 무덤인 창원 다호리 유적이 발굴되었다.
다호리 유적처럼 초기 철기시대 무덤들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나 삼국시대의 고분과 같이 눈에 드러나는 표식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곤 한다.
다호리 유적에 손을 댄 사람들도 전문적인 도굴꾼이 아니었다고 한다.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 저수지 옆의 논바닥에 무덤이 있었으니 외형적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 없어서 전문적인 도굴꾼들의 손길이 미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유적은 동네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우연히 유물을 발견하고 골동상에 가지고 갔더니 제법 묵직한 목돈을 만지게 되었고, 이 재미에 살금살금 유물을 캤다는 것이다.
유적 발굴 후에도 마을 사람들은 발굴단이 철수하면 유물을 찾을 욕심으로 야금야금 이곳저곳을 도굴했다고 한다.
우리 문화재의 도굴 역사는 일제 지배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인들은 눈에 띄는 고분은 거의 모조리 도굴하여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가 버렸다.
일제 시대의 도굴이 얼마나 심했으면 총독부에서 파견된 관리가 경상도 선산 일대의 도굴 현황을 목불인견의 참혹한 지경이라고까지 표현했을까.
평양 부근에서는 파헤쳐진 무덤에서 나온 도깨비불이 밤이면 불야성을 이룰 지경이었고, 부여 일대에서는 웬만한 고분은 이미 노략질 당해 학술 조사를 할 가치조차 없는 무덤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행해진 도굴은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 도굴이 횡행하는 악의 씨가 되었다.
도굴은 일확천금의 횡재를 꿈꾸는 사람들과 비밀리에 문화재를 소유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쉽게 근절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도굴품을 모으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행위를 선견지명과 미래를 꿰뚫어 보는 혜안이라고 자랑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기업가인 고 이병철씨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큰 아들 이맹희씨는 1993년 여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도굴품들 중에서도 명품만 수집했음을 떳떳이 자랑했다고 한다.
그가 불법으로 수집한 국보 및 보물급 문화유산들이 한국 최대의 사설 박물관인 호암미술관의 밑천이 되었으니 참으로 웃지 못 할 일이다.
특히 그의 소장품 중에는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가야금관도 있다고 한다.
만약 이 금관이 일찍 국가에 반환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더라면 가야사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훨씬 일찍 이루어졌으리라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가야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마민족 이동설의 논란이 된 대성동 고분군 (0) | 2021.10.05 |
---|---|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폭로한 복천동 고분군 (0) | 2021.10.05 |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발굴 시작 (0) | 2021.10.04 |
고분 발굴로 신비의 베일을 벗은 가야왕국 (0) | 2021.10.04 |
사용자가 거래 한도를 넘겨 고소하는 경우 (0) | 2021.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