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가야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한 동안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발굴조사한 가장 중요한 고분으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 있다.
복천동 고분군은 현재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져 125기 이상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복천동 고분군은 낙동강 하류 동안에서 확인된 가야 지배층의 유일한 고분군이라는 점에서 1차 발굴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당시만 해도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만한 유물이 거의 없었는데 복천동 고분군에서 1차 발굴때부터 쏟아져 나온 철제 갑주류, 토기류, 장신구 등 다양한 유물들은 일본 것보다 시기가 빠르고 뛰어나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복천동 고분군은 구릉의 능선에 조성되어 있고 수혈식 석실에 장대한 관석으로 천장을 덮고 있어 전형적인 가야식 묘제라고 볼 수 있다.
이 고분은 4~5세기에 부산 지역을 지배한 수장층들의 집단 묘지로서 당시의 문화내용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출토되었다.
복천동 고분군은 김해의 대성동 고분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독자적 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의 고분들은 대성동 고분과 무덤 구조나 부장품의 유형 등이 비슷하지만 부장품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구류나 무기류가 많이 부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복천동 고분군 주인공들은 군사적으로 상당한 세력을 갖춘 집단으로 보인다.
약 1천5백년 전의 지배자층 묘로 추정되는 11호 고분과 22호 고분에서는 금동관으로 보이는 보관 2점, 청동제 칠두령 1점, 철제 마면주 1점 등 1천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금동관은 금동대륜의 금판이나 금동판을 오려 만들었다.
초화형 입식을 세운 것으로 경주나 대구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과는 다른 전형적인 가야식 금관이다.
방울이 7개 달려 있는 칠두령은 가야문화가 샤머니즘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마면주는 가야 문명이 고도의 철기문화를 소유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철제인데 이는 3세기 초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철이 생산돼 주변국가와 교역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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