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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기마민족 이동설의 논란이 된 대성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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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이후로 김해지역에 있는 패총이나 무덤에 대한 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졌지만 중심 고분군이 아니어서 김해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대성동 고분군이 발굴됨으로써 전기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 가야에 대한 진정한 접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해 대성동 고분의 발굴로 우리 고대사에 공백으로 남아 있는 4세기대에 이미 금관가야에 강력한 왕권이 세워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고분에서 발굴된 갑옷, 방패 등과 각종 공구류 등은 같은 시기 일본에서 발견된 것보다 뛰어나고 시기가 앞선 것들이어서 고대 일본이 김해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고분군은 1세기 전후부터 5세기까지 구지로의 낮은 곳에서 정상부를 향하여 지석묘, 옹관묘, 목관묘, 목곽묘, 수혈식석곽묘, 황구식석곽묘 등이 축조되어 있다.

1~3세기의 고분군은 낮은 곳에 위치하며, 구릉에는 4!5세기의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어 이 일대가 가락국 지배층의 묘역임을 알 수 있다.

이 곳에서는 토기류를 비롯하여 동복, 파형동기, 통형동기 등의 청동기와 벽옥제옥장 등의 옥류와 구슬류가 출토되었고 다양한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동복은 높이 19cm, 구경 12~13.5cm 크기의 오르도스형 항아리로 북방 유목민족의 동복과 비슷하지만 생김새나 제작 기법이 부여의 것과 비슷하여 기마민족 남하설과 관련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파형동기, 통형동기 및 옥장은 왜로부터 온 교역품으로서 가야가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중국, 일본과 활발하게 교역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2호분 주곽에서 나온 대형철정은 출토 당시 150여 점이 열겹으로 쌓인 채 일렬로 정리된 상태였는데 이는 금관가야의 정치집단이 철을 장악하여 교역품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출토유물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23호분에서 출토된 완형의 방격규구사신경과 14호분에서 출토된 내행화문경이다.

이것들은 모두 후한대에 중국에서 만든 거울로 구야국의 지배자들이 후한대에 입수하여 2~3백년 동안 대대로 사용한 후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의 거울은 수장의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지위를 상징하는 보물이다.

따라서 이 거울이 무덤에 매장되었다는 것은 4세기경 이 지역에서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권위와 힘을 가진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었음을 뜻한다.

즉, 4세기경 김해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는 이미 고도로 체제가 정비된 국가가 존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전기 가야사의 실체를 밝혀 준 양동리 고분군

김해 양동리 고분은 대성동 고분군과 함께 베일에 싸인 가야사의 신비를 벗길 수 있는 또 하나의 개가로 평가받는다.

이 유적의 발굴로 우리 고대사 연구에서 미완으로 남아 있는 기원후 1~2세기 전후의 전기 가야시대, 특히 구야국의 실체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얻게 되었다.

양동리 유적 중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구야국의 왕릉으로 보이는 제162호 무덤에서는 샤머니즘의 주술적 전통을 보여주는 동경이 9점이나 한꺼번에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고대 분묘에서는 1~2점의 청동거울이 출토된 적은 있으나 9점이 한꺼번에 출토된적은 없었다.

고대의 청동거울은 주술적 힘을 가진 상징물로 검, 옥과 함께 삼보기로 간주된다.

이 묘에서도 청동거울이 대형 철검, 수정,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화려한 경식과 함께 출토됨으로써 피장자는 주술적 힘과 정치권력을 함께 갖춘 수장급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무덤에는 토기는 한 점밖에 없고 대부분의 부장품이 철제 혹은 청동제였다.

이는 피장자가 정치, 군사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지배자로서 이 묘가 축조된 2세기의 가야는 정치, 사회적으로 크게 발전된 사회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2세기 말~3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280호분은 초기 가야사회의 성격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80호 분은 길이 640cm, 너비 400cm, 깊이 90cm의 목곽묘로 피장자의 좌우에 2개의 환두대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길이 88cm의 환두댈=도는 가야지역에서 제일 오래된 환두대도로 추정되는데, 세형동검 이후 철검으로 대표되던 수장의 심벌이 군사적 성격이 강한 환두대도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가야사회가 주술적 세계에서 정치, 군사적인 사회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 발전단계를 추적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되고 있다.

 

또 길이 720cm의 대형 목곽묘인 235호분옆 교란층에서 출토된 동복은 전형적인 오르도스식 동복으로 김해 대성동에 이어 양동리에서도 발견됨으로써 가야와 북방계 문화를 연결시킬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가야사는 고분이 발견되면서 일반인들의 관심속에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본격적인 고분 조사 이전에 비해 가야사에 대한 학위논문이나 고분 조사 이전에 비해 가야사에 대한 학위논문이나 연구서가 크게 증가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들의 연구로 가야는 백제, 신라와 동시대에 건국되어 6세기까지 강력한 세력으로서 존재했던 국가였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가야사는 아직도 해명되지 않은채 남아 있는 부분이 아주 많다.

고고학적 발굴을 더욱 활발하게 진행시키고 문헌 자료와의 연계를 통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할 때만이 가야사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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