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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수로 신화가 후대로 갈수록 신성화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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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간들과 백성들은 수로의 출현을 기다리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라는 아주 위협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여기서 거북의 머리를 나타내는 수首는 임금 또는 우두머리를 뜻하고, 로露는 드러내고 노출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므로 거북의 머리를 내놓으라는 것은 수로, 곧 왕의 출현을 요구하는 것이다.

 

구지가를 부르며 주술적 제의를 행하는것으로 보아 수로부족은 거북을 숭배하는 토템신앙을 갖고 있었다.

거북 토템신앙은 지신족관념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수로가 발견된 곳이 하늘로부터 자주색 끈이 닿은 지상이라는 점도 수로신화 속에 지신족 신앙이 강하게 배어 있음을 알려준다.

본래 수로신화는 지신족 시조전승을 가지고 있었는데 금관가야가 연맹왕국을 이끌 무렵 천신족 신앙체제를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

허황후의 설화 역시 지신족 신앙으로 채워져 있다.

우선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이동해 온 모습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천신족 신앙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등 수직적 이동에 의해서 시조가 태어나지만 지신족 신앙은 시조가 바다나 강물에 띄워져 수평적으로 이동하게 된다.

허황후는 별포진에 배를 대고 내려올 때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신령께 바쳤다.

여성이 바지를 벗어 여성성을 송두리째 노출시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탄생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허황후가 바지를 벗은 것은 수로가 알을 깨고 나온 것에 대응하는 이중 탄생의 모티브이다. 다른 건국 신화에서 신모가 될 동물이 껍데기를 벗고 여성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허황후도 유사한 과정을 밝아 수로와의 성혼에 이른 것이다.

 

지신족 신앙을 표방하던 수로와 허황후가 천신족 신앙을 표방하는 것은 어느 때쯤일까? 그것은 수로와 허황후집단이 9간으로 대표되던 토착세력을 확고히 장악했을 때일 것이다.

수로신화의 모습이 변화하는 것은 9간의 이름이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9간들은 여러 관리들의 어른인데 그 지위와 이름이 모두 소인이나 농부들의 칭호와 다름없으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호칭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직접 이름을 고치고 계림(신라)의 직제와 주나라의 법과 한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수로왕과 허황후신화는 금관국이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행사해 가는 과정에서 신성화되고 있다. 수로신화의 신성화 작업은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권위를 빌리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대가야를 세운 사람이 뇌질주일인데 그와 대조적으로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은 뇌질청예이다. 뇌질은 막연히 족장을 의미하는 토착어이고, 청예는 청양 또는 청양예를 지칭하는 말이다. 청양은 황제인 헌원의 맏아들인 현효를 말하며 소호김천씨의 후손이다.

또한 수로신화는 불교와 토착신앙이 얽혀져 신성화되고 있다. 수로신화 중 금관가야의 중심 도읍지가 일에서 삼을 이루고 다시 칠을 이루는데 칠성이 사는 곳이라 하여 토착신앙과 연결짓고 있다. 또 그곳을 다시 16나한이 상주하는 곳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와도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수로신화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신성화되어 가는 것이다.

 

가야 건국신화 속에서 불교의 영향으로 신성화되는 모습은 허황후신화에서 더 잘 나타난다. 허황후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이며 그곳에서부터 파사석탑을 싣고 온 것으로 묘사하는 등 허황후신화는 불교의 권위를 빌어 신성화 되었다.

왕실을 구성한 수로와 허황후 신화가 모두 신성족 관념을 모색해 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수로집단과 허황후집단이 연합하여 나라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초기 금관가야 왕실 내에서 수로왕과 허황후 집단은 서로 교혼을 하고 있었다. 태자 거등왕의 비는 허황후가 데리고 온 신하 천부경 신보의 딸 모정이다. 또한 거등왕의 태자인 마품왕의 비도 역시 허황후가 데리고 온 종정감 조광의 손녀인 호구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허황후집단은 수로집단과의 교혼을 통해 왕비족으로서의 위치를 더 강하게 가졌던 것 같다.

수로집단과 허황후집단이 공동으로 나라를 이끌었던 이유는 수로집단이 강력한 왕권을 성립시키기에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는 제 6대 좌지왕이 용녀에게 장가들면서 그 무리들을 관리로 등용했다가 나라가 시끄러워지자 용녀를 귀양보내고 정치개혁을 단행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좌지왕대에 왕실의 또 다른 혼인부족으로 생각되는 용녀집단의 등장과 그들 무리의 관리 등용은 지금까지 왕비족으로서 기득권을 누렸던 허황후집단의 사회적 기반을 위협했다. 자연 용녀집단과 허황후집단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고 결국 용녀집단이 거세된 것이다.

용녀집단이 거세되고 난 후 허황후 집단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 단적인 예가 질지왕 2년의 왕후사 창건이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왕후사는 수로왕과 허황후를 숭상하기 위해서 창건되지만 왕후사라는 이름으로 보아 허황후와 보다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즉 질지왕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왕실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허황후집단의 원위를 내외에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왕후사를 창건한 것이다.

이처럼 수로왕과 허황후신화가 신성족 관념을 모색했던 것은 국초부터 좌지왕대까지 두 부족집단이 연합애서 금관가야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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