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에 싸인 가야사를 더욱 신비스럽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의 출신지이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
그녀의 출신지를 추적하는 작업은 한반도 남부와 중국, 그리고 인도, 태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넘나드는 어렵고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허황후는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허황후의 출신지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려 있는 금관가야의 건국신화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기록은 "저는 아유타국 공주로 성은 허요,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라고 하여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온사람으로 되어있다. 또한 제8대 질지왕 2년(452)에 허황후의 원찰로 건립된 호계사 파사석탑의 연기설화를 전하는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에도 허황후의 출신지를 서역, 즉 인도의 아유타국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 내용은 바로 금관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이었을 때에 시조 수로왕비인 허황후 황옥이 후한 건무 24년(서기48)에 서역 아유타국으로부터 싣고 온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허황후의 출신지라고 하는 아유타국은 인도의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 읍이라는 게 통설이다. 실제로 인도에는 기원전 6세기경에 번성했던 16개 도시국가 중 가장 강력한 나라로 꼬살라가 있었고 이 나라의 첫 수도가 아요디아였다고 한다. 아요디아는 갠지스강 지류인 사르유강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기원전 4세기 이후부터는 라마신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그 나라의 왕자였던 라마는 태양신의 화신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에서는 왕권을 정당화시킬때 자신들의 왕조를 라마나 아요디아와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허황후가 인도로부터 직접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측면에서 기존의 제한된 사료를 근거로 허황후 출신지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어왔다. 일찍이 한 아동문학가는 허황후를 아요디아 왕국이 태국 메남강 유역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아 출신의 왕녀라고 보았다. 실제로 아요디아 왕가는 왕후가 출발하던 서기 48년보다 20~30년 전인 서기 20년경 쿠샨왕조에 의해서 왕도를 잃고 어디론가 떠났다난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고 있다.
이 설은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에 나오는 본국을 출발한 공주의 배가 격랑때문에 항해가 어려워 일단 귀향해서 배의 무게를 고쳐서 재출발했다는 기록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아요디아에서 재출발하려면 갠지스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6월의 풍향이 갠지스강의 흐름과 동일하여 범선이 강물을 짧은 기간 내에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실제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주의 사실상의 출발지는 오늘날 태국의 메남강가에 있는 고도 아유티아로 추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특히 김해에 남아 있는 수로왕릉 정문의 현판 좌우의 장식판에 그려진 쌍어문이 바로 아요디아국의 문장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 후 김병모 교수는 쌍어문의 조사를 더욱 심화시켰다. 허황후의 후손인 허적이 조선조에 세운 허황후 능비에 나타나는 보주태후라는 글귀에 착안해 그럴싸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그 주요 얼개는 허황후 일행이 쌍어문을 나라의 문장으로 삼았던 인도의 아요디아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의 옛 보주일대로 와서 자리잡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서기 47년 한나라 조정에 저항하다가 실패하여 강제로 추방당하자 허황후 일행은 양자강을 따라 내려와 오늘날의 상해에 이르렀으며, 서기 48년경에 상해에서 해류를 타고 가락국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수로왕릉 정문에 쌍어문에 그려져 있고, 허황후 능비에는 보줕후라는 칭호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수로왕릉의 쌍어문이 아요디아국의 문장이며 서기 1세기 허황후 때부터 전승된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어야 한다. 또 그 그림이 있는 수로왕릉 정문과 안향각이 그 뒤로 보수되면서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도 함께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 기록에는 그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전혀 없다. 다만 삼국유사 가락국조기에 수로왕릉 묘역 안에 사당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그 사당조차 조선 초까지만 해도 아예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묘역도 거의 폐허 상태였다. 이러한 사정은 세종실록 20년 10월 기묘조에 당시 경상도 관찰사 이선이 보고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신이 순행하여 김해에 이르러 웁성 서쪽 길옆을 살펴 보았는데 가락시조의 능침이 논에 잠겨 있어 혹은 길을 열어 밟고 다니고 혹은 소나 말을 놓아 기르기도 하고 있습니다.
조정은 그 후 수로왕릉과 부속시설을 수축하는 조치를 여러 번 취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16년 4월 을사조에 관련 기록이 있다.
가락왕릉은 김해부의 성 서쪽 2리쯤 되는 평야 가운데 있습니다. 설치한 물건은 혼유석 1좌, 향로석 1좌, 진생석 1좌이고, 능 앞의 짤막한 비석에는 수로왕릉이란 네 글자를 써서 거북머리의 받침들에 세워 놓았으니 이는 바로 경자년(1780)에 특별 전교로 인해 고쳐 세운 것입니다. 또한 돌담으로 둘러쌓았는데 앞은 제각까지 닿았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지금의 쌍어문이 그려진 수로왕릉 정문이나 안향각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쌍어문은 그 건물들의 건립과 더불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면 이 건물들은 과연 어느 시기에 조성된 것일까?
정조 16년(1792) 이후 왕명에 따라 수로왕릉에 배치된 능감들의 기록을 정리한 숭선전지에 따르면 순조 24년(1824)에 게작 동쪽에 안향각을 신축했다.
그 후 내신루 3간이 기울어져 전복될 염려때문에 헌종 8년(1843)에 내신루를 헐고 그 자리에 단층 건물인 회삼문을 옮겨 세워 정문으로 삼았다. 이 외삼문은 정조 17년(1793)에 세운 건물이다. 따라서 정문의 쌍어문은 정조 17년의 신축때나 헌종 8년의 이전 때, 안향각의 쌍어문은 순조 24년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면 쌍어문을 새긴 주체는 누구인가.
숭선전지에 따르면 수로왕릉의 정문과 안향각 등을 세울때 승려들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이 쌍어문은 본래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된 문장으로 김해 은하사 대웅전 수미단, 양산 계원사 대동전 현판 좌우의 공포, 양산 내원사 화청루의 양서, 양산 통도사 삼성각 문설 주 위, 합천 영암사지 비석 귀부, 양양 진전사지 출토 암키와류 등에 부조되거나 또는 단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밖에도 수로왕릉 정문의 현판에는 불교와 밀접한 그림들이 다수 등장한다. 현판 좌우에 있는 네 개의 장식판에 그려진 남방식 불탑이 그렇고 두 마리의 코끼리나 연꽃 봉우리가 그렇다. 더구나 쌍어문이 정말 수로왕릉대에 전래된 것이라면 오히려 수로왕릉이 아니라 허황후릉쪽에 그려져 있어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쌍어문이 조선 정조 이후 새겨진 것으로 보아 헝황후의 출신지를 인도와 관련지으려면 다른 근거를 찾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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