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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철기 독점이 불러온 포상팔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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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독점 불러온 포상 철이 보급되던 초기에는 철 자원을 확보하거나 생산과 교역조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철 생산과 보급은 전쟁보다 교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철 생산집단 역시 교역을 통한 재부를 축적하여 정치적 · 경제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기 보급이 가속화되면서 물리적 대결을 통해 철 교역을 독점하거나 교역망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교역조직이 전쟁으로 개편되거나 해체되기도 하이었다. 이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 원리에 기초하는 자유로운 교역활동이 점차 물리적인 힘으로 통제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이제 교역조직은 철을 비롯한 물자를 유통할 수 있는 경로인 동시에 여러 개의 소국을 통괄하는 확대된 정치조직체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철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했던 수로집단이 철 생산과 교역을 독점하자 주변 세력들로부터 강한 반발과 도전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나 해미 사금 14년 조에는 포상팔국의 침입을 받은 갈라가 신라에 구 원을 청하는 기록이 있다.

 

가을 7월에 포상 팔 국이 공모하여 갈아를 침범하자 가 라왕자가 구원을 요청해 왔다. 왕이 태자 우로(T)와 이벌찬 이음(취콥)을 시켜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 팔국의 장군을 쳐죽이고 포로 6천 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이 기록의 가라는 김해의 구야국이며 포상 팔 국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낙동강 하류와 남해안 일대 수로 교통 의 요지에 있는 세력이었을 것이다.

이들 세력은 본래 김해 구야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나라들이었겠지만 김해세력이 독점적인 권력을 행사하거나 특정 물자를 장악할 경우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포상팔국이 김해의 구야국을 침략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구야국으로부터 필요한 철을 공급받았던 포상팔국은 구야국이 철 공급을 독점하려 하자 이에 저항한 것으로 보인다.

포상팔국이 갈아를 침입했을 때 가라 왕자가 사로국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를 구해준 대가로 김해세력은 신라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 화친을 맺었다. 포상팔국은 사로국의 개입으로 구야국을 공격한 목적이 달성되지 못하자 3년 후 사로 세력권에 속해 있던 강화성(울산 일대)을 공격하였다. 울산은 사로국이 이용하는 중요한 해상교통의 출발전이기도 하지만 양질의 자철광 산지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포상팔국이 구야국과 사로국을 공격한 이유는 철 때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건은 기록에 보이는 가야세력권 내부의 유일한 전쟁이다. 또 당시 해상세력으로 대표되는 수로집단과 경주 중심의 사로세력권, 그리고 포상팔국 등 경남 남부지방의 세 세력권의 변동 상황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포상팔국의 중심세력으로 보이는 아냐국은 교통의 요충지인 점을 이용하여 낙동강 서부지역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김해의 구야국이 아냐 국에게 제동을 걸자 포상 팔 국이 뭉쳐서 김해세력에 도전한 것이다. 포상팔 국의 도전을 받고 난 후 구야국은 세력이 약해졌지만, 여전히 해상교역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400년 고구려의 남장으로 큰 타격을 받은 후 구야국은 교역 중심지로서의 영향력을 점차 상실해 갔다. 국제무역품으로 유명했던 덩이 쇠 가야지역의 철제 유물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물기로 철의 원료인 철정(: 덩이 쇠)이 이에는 4세기 중반 백제의 근처- 이 왜 '본서 품목이 적혀 있는데 그중에 더 철을 얇게 두드려서만" 러기 국제무역품으로 유명했던 덩이 쇠 가야지역의 철제 유물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물건으로 철의 원료인 철정 (: 덩이 쇠)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4세기 중반 백제의 근처고왕이 왜에 보낸 물품 목록이 적혀 있는데 그중에 덩이 쇠 40매가 보인다.

덩이 쇠는 철을 얇게 두드려서만든 철 소재로서 가공하여 여러 가지 철기류를 만들 수 있다. 철장은 대부분 기다란 직사각형의 판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규격이 일정하다. 철판 중간을 약간 잘록하게 만들어 노끈으로 묶어서 다니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어서 삼국지 변진조의 기사와 같이 화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실제로도 가야 유적에서는 철판을 묶어서 무덤에 부장한 것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마치 중국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노끈으로 묶인 채 발견되는 것과 같다. 이 철장은 백제와 신라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특히 가야지역인 김해 대성동, 부산 동래구 복천동 유적에서 수십 점이 한꺼번에 출토되어 철의 왕국 가야의 명성을 드높였다. 또 한 일본열도의 무덤에서도 종종 발견되고 있는데 일본열도에서 만들어진 철기 중에는 가야에서 수입한 철장을 가 대방군까지도 주된 창구가 김해의 가락국이었다. 또한, 낙랑군과 지고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것들이 많다.

 

가야지역 고분에서는 철장뿐 아니라 이전에 모 보던 철제갑옷. 철제 칼 등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환도 대도가 다량 발굴되었다. 환도 대도의 위 형 손잡이에는 칼 주인의 권력을 상징하는 봉황 머리나 용무늬, 날개 펼친 독수리의 추상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무사가 타던 말에 씌우던 철제 말 얼굴 가리개 등의 말 보호기구도 발굴될 정도로 가야는 철이 풍부했다. 요컨대 철산진 김해는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를 잇는 교통상의 요충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기반으로 철을 교역하면서 성장하였다. 특히 철 교역과 관련한 일본열도와의 관계는 중요하다. 일본열도에서 철기 문화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이지만 철광석을 제련하여 철을 추출하거나 사철을 이용하여 철을 생산한 것은 훨씬 늦은 5세기나 6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기원 초기 일본열도는 실제 완제품을 한반도에서 수입하거나 철 소재인 쉼 정을 공급받아 철기를 제작하는 수준이었는데 - 9가 할 대방군까지도 제 다기 의 이후 주된 창구가 김해의 가락국이었다. 또한, 낙랑군과 정을 공급받아 철기를 제작하는 수준이었는데 《삼국지》위지 동이전 기록은 이 지역의 철이 대방군까지도 김해에서 철을 공급받았다는 앞의 제 완제품을 한반도에서 수입하거나 철 소재인 철 대방군까지도 김해에서 철을 공급받았다는 이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은 이 지역의 청이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적으로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넘어 먼 지역에까지 거래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김해의 가락국은 지리적 이점과 철을 매개로 한 대외교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 것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고 쇠퇴하게 되었고 그 공백을 고령의 가라국이 맡으면서 가야의 중심세력은 바뀌었다. 가라국이 위치한 고령지역은 협소한 산간지대이기 때문에 해양지역인 김해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지리적 조건이 불리했다.

그럼에도 가라국이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가야의 중심세력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철이었다. 고령 인근에 있는 '야로( 는 철기 생산과 밀접한 지명인데, 실제로 이곳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철 생산지였다. 지금의 합천군(%) 1 #15) 야로면의 이 철사는 조선조 초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세공으로 정철 9천5백 근을 바쳤던 조선 시대 3대 철장의 하나였다. 철이 풍부한 이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은 가라국이지 리적 약점을 극복하고 후기 가야연맹의 주도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주요한 기반이었다.

 

김해와 고령만이 아니라 영남지방 곳곳에 있는 가야의 여러 나라는 철기 생산에서 신라· 백제 · 왜보다 우월하였다. 그 중가로는 가야 고분 발굴에서 나타나는 부장된 철제품의 양과 질이 다른 나라 것보다 월등히 앞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백제와 신라 · 왜가 가야를 점령하거나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경쟁한 가장 중요한 이유도 바로 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열도의 여러 정치세력이 가야의 여러 나라와 긴밀히 연결되고자 노력했던 이유도 바로 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보다 초기의 열세를 만회하고 마침내 양국을 통합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가야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철기 생산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 간의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서 필수적으로 철제 무기를 확보해야만 했고 백성을 먹여 살리고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농업 생산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철제 농기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유도 바로 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열도의 여러 정치세력이 가야의 여러 나라와 긴밀히 연결되고자 노력했던 이유도 바로 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보다 초기의 열세를 만회하고 마침내 양국을 통합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가야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철기 생산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 간의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서 필수적으로 철제 무기를 확보해야만 했고 백성을 먹여 살리고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농업 생산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철제 농기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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