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야사

가락국 신화가 반영된 수로신화

반응형

신화는 사실이라고 할 수 없지만 역사적 사실을 일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사실로 간주할 수 있다.

마치 암각화나 고분벽화의 그림 그 자체가 사실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사료 구실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야의 건국신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화내용은 토착사회에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 앞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는 가야지역에 북방으로부터 이주민이 도래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신화속에서 나오는 이주민집단의 도래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수로왕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오기 전에 이미 김해 가락국에는 토착세력이 있었는데 9간이 이들 집단을 대표하는 우두머리였다. 이들 토착 집단과 수로 집단이 결합하여 성립된 국가가 가락국이다. 나머지 이주민집단 역시 이른바 전기 가야연맹을 형성했던 소국들이며 그 주도세력은 가락국이었다.

두 번째로 수로신화가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은 가락국의 건국연대가 서기 42년이라는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가락국 건국 연대를 서기 2세기경이나 그 이후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그 이유는 서기 42년이라는 건국연대가 신화에서나 나오는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락국기에 따르면 탈해왕이 신라왕이 되기 전에 가락국에서 수로왕의 왕위를 빼앗으려다가 패하였다는 기로기 나온다.

 

내(탈해)가 이번에 술법으로 겨룰때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송골매에세 잡히기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대개 성인이 살생을 싫어하는 어진 마음때문이었씁니다. 내가 왕과 왕위를 다툰다는 것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탈해는 왕께 절하고 교외의 나루터로 나가서 중국에서 온 배를 대는 수로를 따라서 갔다. 왕은 속으로 그가 머룰러 있어 난리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급히 수군 500척을 보내어 쫓게하니 탈해는 계림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이 그대로 돌아왔다.

이 사건은 탈해왕(57~79)이 신라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어난 사실이다. 실제 탈해왕집단이 금관국을 경유하여 신라로 이동하였다는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에도 보인다. 결국 그 사건은 탈해왕이 즉위한 서기 57년 이전에 발생했고 수로왕은 그 이전에 가락국의 왕위에 있었으므로 가야의 건국연대는 그 이전이 된다.

따라서 가락국의 건국연대는 삼국유사대로 서기 42년일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에 가야가 건국된 것으로 보아 가야는 삼국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건국되어 삼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6세기 중엽까지 독자적인 문화와 주체적인 역사발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최근 다량으로 발굴되고 있는 가야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방증해 주고 있다.

탈해와 수로왕의 싸움은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두 세력 집단 사이의 무력충돌이었다. 탈해는 군대를 이끌고 수로(水路)를 따라 왔는데 이를 물리친 수로집단은 탈해보다 더 우세한 무력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싸움에 져서 떠나가는 탈해를 수로왕이 수군 500척을 보내서 쫓고 있는 점은 수로의 가락국이 이미 군대를 거느린 강력한 세력이었음을 추측케한다.

그런데 가락국은 단지 수로와 토착세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헝황후로 대변되는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수로왕이 탈해를 물리치고 나서 나라가 안정되자 9간들은 이제 왕후를 맞이해야 된다고 간한다. 자신들의 딸 가운데 가장 예쁜 처녀를 골라 왕빌 삼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수로왕은 이를 거부하고 외부 세력인 허황후를 맞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수로왕이 토착세력뿐 아니라 혼인관계를 통해 제3세력인 허황후집단과도 연합한 것은 금관국의 국력이 그만큼 확장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수로왕이 탈해왕과 왕위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하여 권력기반을 확고히 한 직후였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가락국의 건국연대와 수로왕의 활동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기록은 또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 102조의 8월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을 두고 서로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판결을 청하였다. 왕이 처리하기 난처하여 생각하기를 금관국 수로왕이 연로하여 아는 것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여 불러서 물었더니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붙이게 하였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수로왕이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의 국경분쟁을 해결해 주자 신라왕은 6부에 명하여 수로왕을 대접하게 했다. 이 때 수로왕은 예의를 갖추지 못한 한기부주인 보제를 죽이고 그를 숨겨준 음즙벌국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이 기록에 따르면 102년은 수로왕 재위 61년째가 되는 해로 수로왕은 당시 연로한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그가 연로한 나이였다는 점에서 가야의 건국연대가 서기 42년이라는 설은 설득력이 있다. 더구나 신화내용대로 가야의 건국연대는 수로왕이 태어난 해로부터 상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데 가양 건국신화는 온통 허구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일정하게 반영하여 성룁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수로집단이 금관국, 나아가 전기 가야연맹의 주도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후대에 지속적으로 신성화되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는 잘 규명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수로왕 신화를 모두 허구라고 부정하는 것은 학문적 태도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는 빈약한 가야사의 실체 규명을 포기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