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싸인 가야왕국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바로 철의 왕국이라는 점이다.
가야는 철의 왕국이라고 불러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는 의미이다.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서남부 지역에 있었던 가야연맹은 철을 바탕으로 성립된 국가였고, 그 흔적은 지금도 그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경남 창원시 성산의 조개더미 중 네 곳에서는 철이 녹아 흐른 흔적이 발견되었다. 직접 야철한 중요한 근거가 되는 야철 송풍관과 노지 철재도 발굴되었으며 쇳물이 잘 흘러내릴 수 있도록 한 경사지 홈통 등이 확인됨으로써 초기 철기시대 이 지역에서 야철이 행해졌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이 아니더라도 서기 3세기경의 정보를 전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도 가야가 철의 왕국이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국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예,왜가 모두 와서 얻어간다. 장사지낼때에는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 철을 두 군(낙랑군, 대방군)에 공급한다.
후한서 동이전 한조에도 국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예, 왜, 마한 모두 좇아 이를 산다. 무릇 모든 무역에 철을 화폐처럼 쓴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들 기록에서 말하는 국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맥상 가야가 위치했던 변한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 중에서도 김해의 구야국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김해는 인근의 김해군 본생철부락, 상동면 장척부락, 대동면 감내부락 등에 분포된 철광자원을 비롯하여 의창군 다호리 고분군, 김해 양동리 등지에서 출토된 많은 철기 유물을 통해 일찍부터 철을 생산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추정되어 왔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만들어진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조조한 철기뿐만 아니라 보다 발전된 기술인 단조기술로 만든 각종 철기가 다량 발굴되었다. 또한 칼, 창, 화살촉 등 무기류와 각종 형태의 도끼와 괭이, 따비, 낫 등 농공구들이 발견됨으로써 기원전 1세기경 이 지역에 이미 철기구가 실생활에 밀접하게 파급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김해는 지정학적으로도 낙동강이라는 큰 강과 항만을 끼고 있어 외국과의 교역이 편리하다. 그러므로 한사군의 두 군과 쓰시마 해협을 건너 일본 열도까지 거래된 변한의 철산은 김해지방의 철산일 가능성이 크다.
고대사회에서 철은 어떤 의미가 있길래 가야지역의 철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일까? 철의 발견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로 이어져 온 인류 문명의 발전선상에서 볼때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킨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이 개발한 핵무기만큼이나 인류 역사에 크나 큰 변화를 가져온 중대한 발견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철을 장악한 세력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어 있었다. 철제 무기를 지닌 세력과 청동기 무기를 지닌 세력의 싸룸은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철제 무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청동기의 원료인 주석, 아연 등은 많이 채취할 수 없어서 대량생산이 불가능했으며, 철처럼 재질이 단단하지 않아 장신구로는 제격이었으나 무기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다. 또한 청동기로는 농사도 지을 수 없어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신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돌이나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이용했기 때문에 농업 생산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반면 철기는 무기뿐만 아니라 농기구로도 아주 적합했다. 쇠로 만든 괭이나 삽, 따비, 낫 등을 농사에 사용하자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잉여생산물을 낳았는데 이 영여생산물을 둘러싸고 개인간, 집단간의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잉여생산물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계급이 분화되었는데 이런 투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철제 무기였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칼, 창, 화살촉 등 공격용 무기를 개발하였고 방패, 투구, 갑옷 등 방어용 무기도 발달하였다, 전쟁방식은 더욱 발달하여 말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작종 철제 마구류도 개발되었다. 청동제 무기를 지닌 집단은 철제 무기로 무장한 집단 앞에서 맥을 못 추게 되었다.
철이 발견된 이래 우수한 철제 무기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판가름이 났다. 이렇게 한국 고대사를 전쟁의 시기 즉, 전국시기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 주인공은 철제 무기를 지닌 집단들이었다.
이제 전쟁에서 승리한 집단은 전쟁 포로들이나 노예들까지도 동원하여 철광석을 캐내고 철기를 만드는 우수한 기술자들을 독점함으로써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철을 독점하고 이를 다른 나라와 교역하면서 선진 문물과 발전된 정치형태를 받아들여 자국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여러가지 현상은 각 읍락의 개별성을 약화시키고 초읍락적인 지배집단과 정치권력의 성장을 촉진시켰는데 가야도 이렇게 성립하여 발전된 국가였다.
수로왕의 성이 후대에 김씨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신라의 김씨와 더불어 그들이 단야족이었기 때문이다. 수로족은 단야족으로 철강과 성화를 다루는 신비한 힘이 있었으며 그 우두머리인 수로는 성화와 만민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이들 단야족의 수장은 결국 종교적인 신비를 바탕으로 주사장적 단야왕이 되어 다른 부족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
단야족 이야기는 고대 다른 민족들에게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어 문명의 보편적인 발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원나라를 세웠던 몽고족에게는 아직도 단야족의 후예로서 험준한 철벽으로 둘러싸인 철산을 녹이고 나왔다는 전설을 가진 단야족이다. 그들은 단야신을 최고의 신으로 모시며 아직도 단야의 영예로운 후손임을 자부하는 전승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의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와 로마의 단공신 불카누스도 김수로측과 같이 단야의 신으로 숭상되었다.
단야의 신은 신의 보화를 보호하는 산신으로 정착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로서, 중국의 산신기도 역시 단야의 신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낯익은 단야족의 인물을 찾아볼 수 있다. 수로와 동시대 인물로 후에 신라 4대왕이 된 탈해도 역시 야철이라는 특수기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탈해는 죽어서 동악의 산신이 되었는데 이는 신라의 김씨, 박씨가 시조신으로 숭배되는 것과 다르게 그는 야장신으로 더욱 숭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락국기에 나오는 수로와 탈해의 격투 설화는 야철기술을 가진 부족끼리의 권력쟁달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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