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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허황후 신화를 신성화시킨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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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후대인들은 왜 허왕후신화를 신성화시켰을까?

허왕후신화를 신성화그러면 후대인들은 왜 허왕후신화를 신성화시켰을까?

보통 건국신화의 신성화 과정은 왕족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원칙이다.

가령 신라의 건국신화는 김씨 왕족에 의해 신성화되었다.

그러나 금관가야의 경우에는 한 집단이 이 니라 수로왕과 허왕후집단 모두가 신성족 관념을 모색하였다.

이런 현상은 두 집단이 개국 이후 멸망 때까지 왕족과 왕비족으로서 금관가야의 왕실을 배타적으로 구성하였던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수로왕과 허왕후집단이 제3대 마품왕때까지 서로 교혼한 기사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려 있다.

이로 보아 두 집단은 최소한 초기 금관가야의 왕실을 공동으로 공유하였다.

두 집단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금관가야 왕실은 6대 좌지왕대에 한때 위기에 처한다.

가락국기의 다음 기록은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좌지왕은) 용녀에게 장가들어 그 여당을 관리로 등용해서 나라가 소란스러웠다.

계림국(신라)이 (이 틈에) 정벌하려 하였다.

또 복사가 점을 처서 해패를 얻었는데 그 설명에 이르기를 '소인을 없애면 군자가 와서 도울 것이니, 왕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피십시오' 라 하였다.

왕이 '옳다'고 사과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로 귀양을 보내고 정치를 개혁하여 오랫동안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이 기록으로 보아 허왕후집단은 좌지왕대에 새로 등장 하 용녀집단에게 왕비족으로서의 기득권을 위협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좌지왕은 신라의 위협이라는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개국이래 왕비족으로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허왕후집단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결국 새로운 왕비족인 용녀집단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후 금관가야의 주도집단인 허왕후 세력은 예전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왕실내에서 보다 더 강화된 주도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8대 질지왕 즉위 2년에 왕후사를 창건한 것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왕후사는 수로왕과 허왕후를 숭상하기 위해서 창건되지만 그 이름으로 보아 허왕후 시조전승과 더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질지왕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왕실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허왕후집단의 권위를 내외에 인정해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왕후사를 창건한 것이다.

이렇듯 다른 나라들의 개국신화와 달리 허왕후신화가 수로왕 시조전승과 함께 신성족 관념을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은 개국 이래로 두 집단이 계속해서 금관가야의 주도세력으로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왕족이나 귀족의 결혼은 대부분 정략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로 다른 두 집단이 결혼동맹을 야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인도 출신과의 결합은 아무래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실정이었는데, 인도 아요디아국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허왕후 전까지가 맺었다면 두 집단 사이가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밀접한 실제 1세기 무렵에는 중국에서조차도 인도에 대한 정보 비약이 너무 심한 것 같다.

실제 1세기 무렵에는 중국에서조차도 인도에 대한지과 김해 가락국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로 보아 허왕후신화는 후대인들의 계속적인 신성화 작업을 거쳐 윤색된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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