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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발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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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고분군들은 대부분 지배계급의 것으로 피장자의 지위나 피장자가 속해 있던 시대의 사회상도 반영하고 있다.

거대한 고분에 묻혀있는 지배층들은 죽음을 현실세계의 연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 누리던 우월한 지위가 죽어서도 유지되기를 바랬다.

이들의 무덤에는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이며, 순전히 껴묻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한 수 백개의 도기들이 묻혀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시종이나 노예들을 강제로 순장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는 무덤의 주인공이 저승에서도 아무런 불편없이 살기를 바라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리하여 엄청난 노동력과 재부를 쏟아부은 무덤들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무덤이 만주 통구에 있는 고구려 장수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이다.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네모나게 7층으로 쌓아올렸는데 맨 아래층은 길이가 약 30m이고, 높이는 약 11m나 되는 웅장한 무덤으로 5세기 고구려의 국력과 문화 수준을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무녕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녕왕릉도 묘실에서 왕과 왕비의 왕관, 금팔찌, 귀걸이, 묘지석, 도자기 등 2천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중국 남조 양나라의 화폐, 산수문전 등이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야의 경우에도 이에 못지 않은 고분이 있다.

금관가야가 있던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나 김해 대성동 고분군, 대가야가 있던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 아라가야가 있던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 비사벌가야가 있던 창녕의 교동 고분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형 고분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어 가야사의 실체를 밝혀주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야 유적의 발굴은 일제시대부터 이루어졌다.

일본학자들은 고령, 김해, 함안, 진주 등 옛 가야지역의 대형 고분군과 패총들을 발굴 조사하고는 제대로 된 발굴 조사 보고서도 쓰지 않은 채 유물들을 일본으로 가져가 버렸다.

이들이 가야지역 고분에 집착한 이유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일제때 일인 학자들은 고대 일본이 4~6세기 한반도 남부, 특히 김해지방을 식민지로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가야지방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최초로 발굴한 유적은 김해 회현리 패총이었다.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는 초기 철기시대 사람들이 어패류를 잡아먹고 버린 조개무지가 구릉의 비탑에 묻혀있었다, 이 패총은 이마니시 류라는 일본인 학자에 의해 1907년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 후 총독부 조선고적조사위원회에 몸담고 있던 도리이 류조가 1914년과 1917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발굴을 하였다.

 

이처럼 김해 패총이 일본인 학자들의 관심을 모르고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김해지방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중심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 유적에 대해 여섯 차례나 발굴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당시 발표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돌로 만든 유물, 짐승뼈로 만든 유물, 토기류, 철기류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1920년 발굴에서는 중국 한나라때 통용되던 화폐로서 서기 14년에 만들어진 화천이 출토되었다.

만든 시기가 분명한 동전이 출토되자 일본인 학자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 패총을 서기 1세기경에 형성된 유적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석기류와 함께 철제 도끼, 철제 손칼 등이 출토된 것을 들어서 회현리 패총은 철기와 석기를 함께 사용한 금석병용기시대의 유적이라며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대가야의 고분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첫 발굴 조사도 191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촉탁으로 있던 세키노 타다시가 쓴 보고서 가운데 주요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산동 고분군은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있던 쿠로이타 차크미에 의해 발굴되었으나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며 출토 유물도 모두 일본으로 가져가 지금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알 수도 없다.

이 고분군은 학자들이 발굴한 이외에도 일본인들이 수 천 점의 귀중한 유물을 도굴해 가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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