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 발굴로 신비의 베일을 벗은 가야왕국
가야시대의 고분들이 대부분 도굴되어 원형을 잃어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비밀에 싸인 왕국 가야는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야시대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에서 금동관 및 화려한 장신구들, 철제 무기류, 철정 등이 발굴됨으로써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결코 뒤지지 않는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가야는 자체의 역사 기록도 없고, 한국 고대사 연구의 기존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삼국사기에서도 본기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어 그 실체를 알기 힘들었다.
특히 일본서기에서는 가야를 자주적인 국가가 아닌 왜에 조공이나 바친 부용집단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임나일본부설의 진원지로 둔갑시켜 가야의 실체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문헌이 빈약한 가야사에 있어서 만약 고분마저 없었다면 가야사는 고스란히 땅속에 묻혀 버렸을 것이다.
고분은 가야의 역사를 복원하는데 있어서 표지적 존재가 되고 있다.
가야뿐만 아니라 삼국의 역사와 문화도 고분을 통해서 상당 부분 밝혀졌기 때문에 이 시대를 통칭하여 고분시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도 고총 고분이 존재한 시기인 3세기말~7세기중엽을 고분시대라고 구분할 정도로 고분은 크기나 부장 유물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인류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분은 인류 역사와 문화의 보고
고분이란 옛사람의 시체를 매장한 시설물로서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흙이나 돌을 쌓아올린 분구를 말한다.
고분은 옛날 사람들의 생활, 사상, 문화, 역사를 복원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문화적 자료이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문자기록이 적기때문에 부득이 당시 인간이 남겨 놓은 유적이나 유물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생활 유적은 인간이 같은 장소에서 계속 거주하며 살았기 때문에 대부분 파괴되어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이 드물다.
그러나 고분 유적은 시체를 매장한 유적이라서 잘 보존되어 왔기 때문에 당시 생존했던 사람들의 정치, 사상, 사회, 건축기술, 회화, 공예 등 여러 방면을 연구할 수 있다.
고분을 인류 문화와 역사의 보고라고 일컫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류가 언제부터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느냐 하는 것은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흔적으로는 구석기시대 중기부터 약 7~8만년 전의 것이 가장 오래된 무덤이다.
중기 구석기시대 매장의 예는 세계의 몇 군데에서 발견되는데 프랑스 도르돈느 지방의 한 동굴에서는 땅을 약간 파고 묻은 성인 두 명과 어린이 두 명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또 중앙아시아의 태쉬크-탓슈에서는 어린이를 누인 다음 몇 개의 염소 뿔로 시체를 보호하고 있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후 인류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게 되자 지석묘, 석관묘 등 거대한 무덤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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