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 (13) 썸네일형 리스트형 허황후 신화를 신성화시킨 까닭은 그러면 후대인들은 왜 허왕후신화를 신성화시켰을까? 허왕후신화를 신성화그러면 후대인들은 왜 허왕후신화를 신성화시켰을까? 보통 건국신화의 신성화 과정은 왕족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원칙이다. 가령 신라의 건국신화는 김씨 왕족에 의해 신성화되었다. 그러나 금관가야의 경우에는 한 집단이 이 니라 수로왕과 허왕후집단 모두가 신성족 관념을 모색하였다. 이런 현상은 두 집단이 개국 이후 멸망 때까지 왕족과 왕비족으로서 금관가야의 왕실을 배타적으로 구성하였던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수로왕과 허왕후집단이 제3대 마품왕때까지 서로 교혼한 기사가 가락국기에 실려 있다. 이로 보아 두 집단은 최소한 초기 금관가야의 왕실을 공동으로 공유하였다. 두 집단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금관가야 왕실은 6대 좌지왕대에 한때 위기에 처한다. 가.. 철기 독점이 불러온 포상팔국의 난 철기 독점 불러온 포상 철이 보급되던 초기에는 철 자원을 확보하거나 생산과 교역조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철 생산과 보급은 전쟁보다 교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철 생산집단 역시 교역을 통한 재부를 축적하여 정치적 · 경제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기 보급이 가속화되면서 물리적 대결을 통해 철 교역을 독점하거나 교역망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교역조직이 전쟁으로 개편되거나 해체되기도 하이었다. 이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 원리에 기초하는 자유로운 교역활동이 점차 물리적인 힘으로 통제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이제 교역조직은 철을 비롯한 물자를 유통할 수 있는 경로인 동시에 여러 개의 소국을 통괄하는 확대된 정치조직체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철을.. 철의 왕국 가야 베일에 싸인 가야왕국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바로 철의 왕국이라는 점이다. 가야는 철의 왕국이라고 불러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는 의미이다.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서남부 지역에 있었던 가야연맹은 철을 바탕으로 성립된 국가였고, 그 흔적은 지금도 그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경남 창원시 성산의 조개더미 중 네 곳에서는 철이 녹아 흐른 흔적이 발견되었다. 직접 야철한 중요한 근거가 되는 야철 송풍관과 노지 철재도 발굴되었으며 쇳물이 잘 흘러내릴 수 있도록 한 경사지 홈통 등이 확인됨으로써 초기 철기시대 이 지역에서 야철이 행해졌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이 아니더라도 서기 3세기경의 정보를 전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도 가야가 철의 왕국이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국에서 .. 허황후는 인도인인가 신비에 싸인 가야사를 더욱 신비스럽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의 출신지이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 그녀의 출신지를 추적하는 작업은 한반도 남부와 중국, 그리고 인도, 태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넘나드는 어렵고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허황후는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허황후의 출신지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려 있는 금관가야의 건국신화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기록은 "저는 아유타국 공주로 성은 허요,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라고 하여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온사람으로 되어있다. 또한 제8대 질지왕 2년(452)에 허황후의 원찰로 건립된 호계사 파사석탑의 연기설화를 전하는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에도 허황후의 출신지를 서역, 즉 인도의 아유.. 가락국 신화가 반영된 수로신화 신화는 사실이라고 할 수 없지만 역사적 사실을 일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사실로 간주할 수 있다. 마치 암각화나 고분벽화의 그림 그 자체가 사실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사료 구실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야의 건국신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화내용은 토착사회에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 앞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는 가야지역에 북방으로부터 이주민이 도래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신화속에서 나오는 이주민집단의 도래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수로왕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오기 전에 이미 김해 가락국에는 토착세력이 있었는데 9간이 이들 집단을 대표하는 우두머리였다. 이들 토착 집단과 수로 집단.. 수로 신화가 후대로 갈수록 신성화되는 이유 9간들과 백성들은 수로의 출현을 기다리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라는 아주 위협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여기서 거북의 머리를 나타내는 수首는 임금 또는 우두머리를 뜻하고, 로露는 드러내고 노출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므로 거북의 머리를 내놓으라는 것은 수로, 곧 왕의 출현을 요구하는 것이다. 구지가를 부르며 주술적 제의를 행하는것으로 보아 수로부족은 거북을 숭배하는 토템신앙을 갖고 있었다. 거북 토템신앙은 지신족관념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수로가 발견된 곳이 하늘로부터 자주색 끈이 닿은 지상이라는 점도 수로신화 속에 지신족 신앙이 강하게 배어 있음을 알려준다. 본래 수로신화는 지신족 시조전승을 가지고 있었는데 금관가야가 연맹왕국을 이끌 무렵 천신족 신앙체제를 .. 김수로왕 건국신화 가야의 건국을 전하는 사료로는 김수로왕 신화가 유일하다. 이 신화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고 있는데 설화적이며 후대에 윤색이 가해져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모든 신화나 설화는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기에 김수로왕신화에도 신비의 왕국 가야사의 실체를 해명해줄 사실이 담겨 있을 것이다. 실제로 김해에는 현재까지 건국신화와 관련된 유물과 유적지들이 남아 있는데 구지봉, 수로왕릉의 쌍어문, 파사석탑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구지봉은 가락국 시조의 수로왕이 하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은 허황후릉 서쪽 얕은 구릉 선단부로서 거북이 머리를 내민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구지봉에는 가락국의 건국신화를 형상화한 석조물을 설치해 두었는데, 여섯.. 기마민족 이동설의 논란이 된 대성동 고분군 일제시대 이후로 김해지역에 있는 패총이나 무덤에 대한 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졌지만 중심 고분군이 아니어서 김해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대성동 고분군이 발굴됨으로써 전기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 가야에 대한 진정한 접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해 대성동 고분의 발굴로 우리 고대사에 공백으로 남아 있는 4세기대에 이미 금관가야에 강력한 왕권이 세워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고분에서 발굴된 갑옷, 방패 등과 각종 공구류 등은 같은 시기 일본에서 발견된 것보다 뛰어나고 시기가 앞선 것들이어서 고대 일본이 김해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고분군은 1세기 전후부터 5세기까지 구지로의 낮은 곳에서 정상부를 향하여 지석묘,..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폭로한 복천동 고분군 해방 이후 가야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한 동안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발굴조사한 가장 중요한 고분으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 있다. 복천동 고분군은 현재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져 125기 이상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복천동 고분군은 낙동강 하류 동안에서 확인된 가야 지배층의 유일한 고분군이라는 점에서 1차 발굴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당시만 해도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만한 유물이 거의 없었는데 복천동 고분군에서 1차 발굴때부터 쏟아져 나온 철제 갑주류, 토기류, 장신구 등 다양한 유물들은 일본 것보다 시기가 빠르고 뛰어나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복천동 고분군은 구릉..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발굴 시작 거대한 고분군들은 대부분 지배계급의 것으로 피장자의 지위나 피장자가 속해 있던 시대의 사회상도 반영하고 있다. 거대한 고분에 묻혀있는 지배층들은 죽음을 현실세계의 연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 누리던 우월한 지위가 죽어서도 유지되기를 바랬다. 이들의 무덤에는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이며, 순전히 껴묻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한 수 백개의 도기들이 묻혀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시종이나 노예들을 강제로 순장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는 무덤의 주인공이 저승에서도 아무런 불편없이 살기를 바라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리하여 엄청난 노동력과 재부를 쏟아부은 무덤들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무덤이 만주 통구에 있는 고구려 장수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이다.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네모나게 7층으로 쌓아올렸는데 맨 아래층.. 이전 1 2 다음